조선중기의학자ㆍ의병장
수은 강항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나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운 인물
본관 진주, 자 태초(太初), 호 수은(睡隱).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나 신동神童으로 불리었다. 16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와 군기를 모아 의병을 지원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南原)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고, 남행(南行)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왜국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라를 향한 구국 일념으로 기회를 보아 탈출을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발각되어 좌절되자 왜국의 병력과 지형 및 전략, 전법을 왜병 몰래 본국에 보냈다(적중봉소敵中奉疏). 그의 인품과 학식에 감화된 왜인들이 학문을 배우고자 하므로 일본 불교 학자에게 칠서七書와 주자학朱子學을 가르쳐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오사카[大阪]로 끌려가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곳의 지리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적정(敵情)을 비밀리에 인편으로 고국에 보고하였으니 그 글을 모아 엮은 책이 간양록이다.
1598년 교토[京都]에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적정을 적어 밀송(密送)하고, 1600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고국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 당시 납치되어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격문을 발송, 소집하여 함께 귀국했다.
1602년 대구교수(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얼마 후 사임하였고,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포로로 일본에 있을 때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 1561~1619)에게 성리학을 전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많은 명유를 배출시켜 일본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으며, 억류지였던 일본 대주시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송화(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고,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고종 19년(1882년)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영광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었다. 이후 유림들이 힘을 모아 용계사를 내산으로 옮겨 새로 사우를 짓고 신도비를 세워 내산서원內山書院이라 이름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문신
김심언(金審言)
고려초기의 문신으로 그의 봉사는, 성종 때 본격화되는 유교적 정치이념의 구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최승로와 함께 대표적인 유학자로 불리 우며 사회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창조하는 독자적 능력을 지녔다.
시조 문안공 김심언 ? ∼1018(현종 9) 은 신라 제56대 경순대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은열의 3세손이다.
영광 김씨靈光 金氏의 시조이자 고려 성종으로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의 명신名臣이며 당대의 명유名儒이다. 상시常侍 최섬崔暹의 사위이며 제자이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보궐 겸 기거주가 되었다. 990년(성종 9)에 봉사(임금에게 보내는 상소문)를 올려 성종의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봉사는, 성종 때 본격화되는 유교적 정치이념 실현에 큰 지침이 되게 하였으며 애국론정편 보민 권농편을 저술하여 후세의 정치사상과 제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의 봉사를 보면 첫째는 육정육사의 글과 자사육조에 한 것이며, 둘째는 서경에 사헌한 사람을 분견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육정육사의 글은 중국 한나라의 유향이 찬한 ≪설원≫의 육정육사의 글을 참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대체로 인신의 행실에는 육정과 육사가 있는데, 육정을 행하면 번영하고 육사를 범하면 욕이 된다. 육정의 첫째는 성신으로 어떤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홀로 환하게 앞을 내다보고 사전에 군주에게 간하여 잘못된 정치를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사람, 둘째는 양신으로 군주를 예의로써 권면하고 좋은 계책으로써 보필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또 셋째는 충신으로 현인 천거에 힘쓰고 자주 고사를 들어 군주의 뜻을 면려할 수 있는 사람, 넷째는 지신으로 밝게 성패를 살펴 구제하고 화를 돌려 복을 만들어 군주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 다섯째는 정신으로 법대로 행동하고 일을 분담하며 절검할 수 있는 사람, 여섯째는 직신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육사의 첫째는 구신으로 관에 안거하여 녹을 탐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고 관망하는 신하, 둘째는 유신으로 군주가 말하는 것은 다 옳다 하고 군주가 하는 것은 다 좋다 하며 아첨만을 일삼는 신하, 셋째는 간신으로 마음이 음흉하여 선인을 시기하고 현인을 미워하며 군주의 정사를 흐리게 하는 신하라 하였다.
또, 자사육조는 ≪한서≫에 있는 것으로서 자사가 해야 할 일을 열거하고 있다.
즉, 첫째는 서민의 질고와 실직한 자를 살피는 것, 둘째는 묵수장리 이상의 관정에 거하는 자를 살피는 것, 셋째는 백성들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와 간교한 자를 살피는 것, 넷째는 전범률과 사시금을 살피는 것이다.
또 다섯째는 백성이 효제하고 염결하며 행수가 바르고 재주의 특이한 것을 살피는 것, 여섯째는 관리가 전곡을 장부에 기입하지 아니하고 짐짓 흩어버리는 것을 살피는 것이니, 위에 말한 육정육사의 글과 자사육조를 담당관청에 맡겨서 개경과 서경의 모든 관아 및 지방 각 관청의 당벽에 각각 그 글을 써붙여 출입할 때마다 보게 하여 귀감으로 삼게 하자고 성종에게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 서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나라가 동도에 지대어사를 두던 예에 의거하여 사헌 1원을 분견하여 서경 관내 관리들의 잘잘못을 살피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성종은 그의 건의를 가상하게 생각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목종 때 지방의 목사로 나가서는 농사를 권장하고 백성을 구제하기에 힘썼다.
1010년 현종 즉위 뒤 산기상시散騎常侍에 발탁되어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그 후 1014년에는 국사國史를 편수하는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이어 내사시랑內史侍郞 평장사平章事 그리고 외직外職인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있다가 1018년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문안文安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최승로와 함께 대표적인 유학자로 불리었다. 이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새 문화를 창조하는 독자적 능력을 지녔다. 이들의 유학은 관념적이거나 사대적인 성격에 빠지지 않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특성을 지녔다.
≪참고문헌≫高麗史, 高麗史節要.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자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원불교의 교조敎祖이다. 그는 1891년 5월 5일(음력 3.27) 영광군 백수읍 길동리 영촌마을에서 부친 박성삼朴成三, 모친 유정천劉定天의 4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鎭燮, 청년시절에는 처화處化라 불렀다.
원불교를 창립한 이후에는 제자들이 소태산 대종사少太山大宗師라 불렀다.
7세경부터 우주 대자연의 현상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9세경부터 인생의 모든 일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를 깨우치기 위해 구도 생활을 시작하여 20년의 오랜 구도 생활 끝에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음 3.26) 이른 새벽,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우주와 인생의 큰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성자와 달리 본인이 태어나 구도하고 대각한 고향에서 제자들을 얻고 이들과 함께 저축조합, 방언공사防堰工事, 혈인기도血印祈禱 등으로 교단 창립의 기초를 닦았다. 그 후 부안 변산 봉래정사蓬萊精舍에 들어가 교리와 제도를 구상한 후 1924년에 전북 인산군 북일면 신용리(현 익산시 신룡동)에 총부를 건설하고 불법연구회란 임시 명칭으로 교단을 창립하였다.
그는 스스로 깨친 진리를 ‘일원상一圓相’이라 표현하고, 삼학팔조三 學八條, 사은사요四恩四要를 교리의 근간으로 삼았다.
대종사 그는 1943년까지 익산 총부에 주재하며 제자들과 교단 창립에 노력하면서 서울, 부산, 전주, 영광, 원평, 마령 등지를 순회하며 교세 확장에 힘썼다. 교단은 일제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호남지방의 농민과 수탈당한 서민들을 주축으로 하여 점차 발전해 나갔다.
1943년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생사진리에 관한 마지막 법문을 설파하고 53세를 일기로 총부(전북 익산시 소재)에서 열반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박길진朴吉眞(1915~1986)이다.
이후 제자들은 원불교란 이름을 짓고 현재 익산 총부 내에 대종사 석탑, 기념관을 건립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후천개벽의 주세불主世佛로 존숭하고 있다. 또한 소태산이 열반한 6월 1일을 ‘육일대재’라 하여 기념하고 있다.
현재 백수읍 길용리 일대는 소태산 박중빈의 출생지이며 그가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 곳으로서 원불교 성지로 추앙받아 관리되고 있다.
깨달음의 기쁨을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고 하고 후천개벽의 새 문명사회를 이끌어갈 원불교의 문을 열었다.
이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개교표어로 내세우고 2차 세계대전과 일제하의 암울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최초 9인 제자들과 함께 생활 불교, 대중 불교를 표방하며 불법의 생활화, 시대화, 대중화에 힘쓰며 미래사회에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제시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을 발표한 후 1943년 6월 1일 세수 53세로 열반에 들었다.
탄생-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는 1891년 5월 5일 이곳 옥녀봉 아래 영촌에서 탄생(탄생가)
발심- 7세부터 하늘의 이치를 비롯 인간생활에 의심이 걸려 구도를 시작 (옥녀봉)
기도- 11세부터 의심을 해결하고자 산신령을 만나려는 뜻에 기도(삼밭재)
스승을 찾아서 - 16세부터 6년간 스승 찾아 사방을 다님(구호동집터)
입정-22세부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라는 한생각에 입정(선진나루)
대각-1910년 4월 28일, 대종사 26세에 모든 의심 다 깨우치는 대각 이룸(대각터,만곡일월비)
교화시작-소태산 대종사는 당시 세상을 보고[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 선포,[최초 법어]를 제자들에게 가르침(최초설법지)
교화단 조직 - 따르는 40여 명 중 9인을 창립 표준제자로 선정 최초의 단 조직
저축조합운동- 1917년 저축조합을 조직하여 금주단연, 근검절약, 공동노동, 보은미 저축, 허례페지를 실천, 공부와 사업의 기초 만듦
방언공사 - 1918년부터 1년간 바다 개펄 막아 논을 만드는 방언공사 이름(방언관리소터, 정관평, 제명바위)
법인기도-창생 위해 목숨을 희생하겠다는 9인 제자의 간절한 기도로 법계에 인증받는 법인성사를 이룸(구간도실터, 9인봉)
영산원 건설-1918년 옥녀봉밑 구간도실, 1923년 돛드레미로 옮겨 영산원이라 이름하고 교단 창립기의 많은 선진들이 대종사 모시고 수도
영광이 낳은 국악인
공옥진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 /재담 /몸짓을 가미한 연극의 일종인 창무극의 창시자이며 그것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리는 한국판 천의 얼굴을 가진 명인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소리에 춤 /재담 /몸짓을 가미한 연극의 일종인 창무극의 창시자이며 그것을 해학과 풍자로 승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기쁨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리는 한국판 천의 얼굴을 가진 명인으로 일컬어 지고 있다.인간의 껍질을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고통스러운 삶의 몸짓이 춤으로 표현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게도 울게도 한다. 그녀의 삶이 그렇듯 공옥진 몸짓과 표정에도 꾸밈이 없다. 인간의 껍질, 고통과 슬픔의 껍질들을 과감하게 벗어 그녀의 1인 창무극은 솔직하면서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기교가 없다는 것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느 고전 무용가에게 공옥진의 춤에 대한 이야기를 넌즈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고전무용가에게 당신도 공옥진처럼 춤을 출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부끄러워서, 나는 그런 춤 못춰요라고 잘라 말했다. 바로 그런 점이다. 다른 춤꾼들은 부끄럽다는 이유로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옥진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아무데나 누구앞에서도 놀이꾼의 얼굴을 벗어 버릴수 없는 철처한 공연의 주역같은 데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웃겨야 직성이 풀리고 울려야 진짜 얘기를 한 것 같은 흡족감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갖고 있는 술수는 무궁무진이다. 그러나 그의 춤에는 사약함이 없다. 과장이 있지만 교만함이 없고 꾸밈이 있지만 거짓이 없다. 따뜻한 인정이 있고 인심좋은 주인이 손님대하듯 풍성한 반가움이 있다.
공옥진은 1933년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추동마을에서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대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공대일(남도 지방 문화재)이다.
공대일은 일제강점기 때 판소리 명창인 공창식, 공기남과 한 집안으로, 공옥진은 이와 같은 판소리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공대일에게 단가 ‘진국명산’과 ‘옥루사창’을 사사하였다.
간간이 춘향가도 익혔지만 춘향가는 단가를 먼저 배우고서 배우라는 호령이 떨어져 그만 어깨너머로 아니면 광목이불의 찬 속에서 사설을 익혔으나 독공한 탓이라 쉽게 내용이 들어오지 않고 장단이 잘 안 맞았다.사랑채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제자들의 소리를 따라도 해 보았으나 안 되어서 부엌에서 군불을 때다가 부지깽이로 장단을 쳐가며 불러 보기도 했다.
공옥진은 1938년 6세부터 성창순의 부친인 성원목成元睦(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에게서 소리 수업을 시작하여 7세 때 창극단에서 춘향전 어사출도 장면에 출연하면서 김연수의 지도를 받았다.
성원목에게서 소리수업을 하게 된 것은 공대일이 자기가 가르치는 것보다 남에게 배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한성준 명무名舞에게 장고춤과 살풀이춤을 배웠고, 연희패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최승희에게 춤을 배우고자 최승희 무용단에서 천대 받는 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1945년 귀국하여, 공대일이 영광에서 거주하며 광주협률사 단원과 광주 권번 선생으로 있을 때 다시 판소리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하여 14세 때 1946년 군산명창대회에서 1등, 1947년 고창명창대회에서 1등을 한 후 1948년 임방울에게서 판소리지도를 받았다.
공옥진은 조선창극단, 국극협회(박녹주), 협률사(임방울), 여성국극단(조금행) 등에서 창극 활동에 참여하면서 조상선, 안기옥, 박범식, 공인옥, 윤소영, 이매방 등 으로부터 소리·춤·창극 등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동초 김연수가 이끄는 우리국극단에 들어가 여러 가지 난역雜役을 맡아 공연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소리를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창극단을 전전하면서 얼굴표현과 몸짓, 소리가 늘어갔고 심청가는 김연수 바디로,흥보가는 김연수·공대일 바디로, 수궁가는 임방울 바디를 배우고 익혔다. 이렇게 공옥진은 소리꾼의 딸로서 판소리의 모든 것을 체득하였다.
공옥진이 심청가 등을 1인 창무극으로 창작하게 된 시기는 광복 이후이다. 공옥진은 광복 이후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가족과 헤어지게 되면서 이때 여러 걸인들을 만났고, 신체장애가 있는 걸인들도 만나게 되었다. 이런 동료들과 돌아다니면서 이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며 동냥하는 모습들이 일반인과는 다르게 손과 발을 뒤틀거나, 꼬고, 다시 풀어헤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익히게 되었다.
이후 공옥진은 가족들과 상봉하여 창극단 생활을 하면서 소리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창극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18세 때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전남구례 천은사에서 수진秀眞이란 법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으나 2년 2개월(1956~1958) 만에 파계破戒하고 다시 예藝와 속俗의 문턱을 드나들었다.
이후 소리 길을 잠시 접고 영광군 영광읍에서 ‘옥진관’이라는 요리집을 운영하면서 마음이 넉넉해진 공옥진은 해방 후 어려운 생활을 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지나가는 걸인들을 위한 잔치를 자주 베풀었다. 그리하여 걸인들과 장애인들은 신명나는 놀이를 하게 되고 이들과 어울리던 공옥진은 그들의 노는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신체장애를 가진 동생과 조카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한을 몸짓으로 풀어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었다.
공옥진은 이 시기에 각종 문화축제에서 판소리를 일인 창무극(이하 1인 창무극)으로 발전시켜 공연하면서, 한현선 등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한편 영광군에서는 매년 남도문화재에 출전하였는데 1974년 제6회 남도문화제에서 영광군의 길쌈놀이가 전국최고상을 받았다. 이때 무형문화재 발굴과 총연출은 한국국악협회영광군지부장 한희천이 맡고 지도는 공옥진이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공옥진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중앙대학교 무용학과 정병호교수는 공옥진의 재능에 감동하여 서울의 공간사랑空間舍廊이라는 공연무대에 공옥진을 내세우게 되었다.
1978년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영광에 묻혀있던 공옥진이 서울의 공간사랑에 초청되면서 처음으로 공옥진의 창무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병호는 ‘1인 창무극’이라고 하였다. 이 공연은 4월 20일 공간사랑 소극장 개관기념에서 공연한 심청가 중 맹인잔치 등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대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단독공연이 성사되었다. 공연은 대중의 요구에 의해 이어져 1978.12.2~2.17, 1979.3.3~3.15, 1981.9.14~9.19일 재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공옥진은 전통적인 판소리 기반 위에 재담, 민속무용, 창극을 종합하여 1인창무극을 구성하고 무대에서 선보인 것이다. 그 후 그녀는 1인창무극 흥보전과 수궁가도 공연하면서 전통성을 간직하고 이를 변용,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장르를 창작하는 열정을 보여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명성을 얻은 공옥진은 국내의 각 대학, 또는 각 방송사뿐만 아니라 미국링컨센터, 카네기홀, 일본, 대만, 영국 등 전 세계에서 서민적인 1인 창무극 심청전 공연을 선보였다.
공옥진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공연을 하지 못하였으나 예술에 대한 열정이 2010년 그녀를 다시 국립극장(해오름) 무대에 오르게 하였다. 문화체육부장관·국회의원·영광군수 등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연을 마쳤다. 이 공연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다.
언제나 낮은 자리에 있었기에 지고히 빛나는 예술. 병신춤의 명인이라 부를 만큼 병신춤을 재주로 피워냈고 더불어 원숭이, 퓨마 등 동물의 모의한 춤까지 추고 있어 전통연예인이면서 예술적 표현력에 왕성함을 보이는 창작인이기도 했다. 곧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모든 재주들을 감고 심청전, 흥부전 등을 일인극으로 엮어 노래와 춤, 연기 모방춤으로 이끌어 낸다. 한평생을 묵힌 술처럼 그녀의 예술은 입에 쩍쩍 달라 붙는다.
그렇다. 그렇기에 그녀의 공연은 언제나 많은 관객을 운집시켰고 그녀의 공연에 그녀도 울고 관객도 울고 관객도 웃고 그녀도 웃는다. 언론이 주목했고 호사가들의 입에서도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명인이지만 사실 그녀의 삶은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시골의 억척스런 할머니이다.
1931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 중 둘째딸로 태생(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 서울 협률사 초기 멤버이던 공창식 명창)
1938~1943 최승희에게 사사
1945~1947 조선 창극단 입단
1948 고창 명창대회 장원
1953~1955 구례 천운사 입산 수도
1957~1963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 입단
1961~1963 김연수 우리국악단 입단
1964~1966 김원술 안성국악단 입단
1966~1967 박연수 국극 협회 입회 <처녀별>,<바다로가는사람>,<동명성왕>,<흑진주>,<장화홍련전> <해방가>,<심청전>등 창극에서 주역
1967~1968 일본 순회 공연
1978 공간사랑 1인 창무극
1983 문예회관 대극장 1인 창무극
1985 세종문화회관, 1인 창무극
1991 호암아트홀 1인 창무극
1993 미국/영국/중국/일본 등 순회 공연
1994 런던페스티발 국제예술제 한국 대표외 미주 및 동남아 순회 공연
1995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96 서울 두레 소극장, 1인 창무극
1996 공주 아시아 1인극제, 1인 창무극 '심청전' 현재 전남 영광군 예술 연수소 소장
- 문화재명 : 판소리(일인창무극 심청가)
- 지정번호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 29-6호
- 지정일자 : 2010.11.05
- 전승지 :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180-7
- 보유종별 : 일인창무극 심청가
- 예능보유자 : 공옥진孔玉振(1933년 3월 28일생)
- 지정사유 : 공옥진은 판소리 명창가계를 타고 태어나 성원목, 김연수, 임방울 등 명창들에게 소리를 학습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창극활동을 해오면서 판소리의 음악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니리와 발림 등을 극적으로 발전시켜 일인창무극을 연행해 왔는데, 이는 문화변용의 전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판소리에 기반을 두고 문화변용의 형태로 발전한 일인 창무극 가운데 주 연행 종목인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인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5·18과 민주운동의 기관차
박관현
5.18 직전까지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하다가 비상계염 전국 확대 조치와 동시에 보안사에서 재야 인사를 체포하자
여수로 도치하였으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단책투쟁끝에 사망했다.
늦여름에 피어나는 원색의 나팔꽃은 순정하면서도 처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환한 낮에는 노래하듯 구호를 외치듯 활짝 피었다가 어두운 밤에는 불안한 미래에 떨듯, 초조한 듯 오므라든다. 나팔꽃은 한 젊은 혁명가의 삶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 되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대중집회에서 박관현의 연설이 이렇게 시작되자 시민들은 안도하고 또 기대에 벅차올랐다. 대학생의 위상은 1980년에만 해도 지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얼굴은 햇살을 만난 나팔꽃처럼 활짝 펴졌다.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떠도는 나팔꽃씨의 음모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마지막 투쟁에 대한 의분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박관현은 1953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서 태어났다. 양심적인 법조인이 되어 사회와 민중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꿈을 품고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입학한 그해 6월 27일 송기숙, 명노근, 안진오 교수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 지표」라는 성명성을 발표하고 전원 정보부에 연행된 소위 ‘교육지표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전남대 민주학생 선언문」을 낭독하고 ‘연행교수 석방’, ‘학원사찰 중지’을 외치며 시위를 펼친다. 이 일을 겪으면서 대학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해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약 60여일 동안 광천동 지역의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하면서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79년 4월부터는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의 삶에 다가서 지역문제를 함께 고민하였다. 들불야학은 그의 마음에 모두가 잘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들불처럼 옮겨 주었다.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을 향한 진실된 마음과 헌신적인 자세는 주위 동료들에게 큰 신뢰를 심어주었다.
1980년 4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힘입어, ‘민주학원의 새벽 기관차’라는 구호를 걸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다. 그의 유세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4월 8일 2차 유세에는 1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해 사상 초유의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전개한 투쟁에서도 그는 ‘사람이 기본이고 원칙이다’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교수실에 못을 박는 행사에서는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슬픈 현실을 먼저 반성했다. 5월초 단식농성 때는 늦은 밤 추위에 떠는 후배들을 위해 학생회실 커튼을 뜯어 이불로 덮어주기도 했다.
박관현을 중심으로 한 비상학생총회는 5월 8일부터 14일까지 학내에서 민족민주화 성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5월 14일에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다. 도청 앞 분수대에는 2만 명이 넘는 시민 · 학생이 모였다. 심금을 울리는 박관현의 연설은 대중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이은 15일과 16일의 집회로 박관현은 ‘광주의 아들’로 거듭나고 있었다.
5월 17일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박관현은 주위의 강력한 권유를 저버리지 못하고 광주를 떠나게 된다. 여수와 서울 등지에서 숨어 지내면서 죽는 것보다 더 버거운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감당해내야 했다. 1982년 4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내란 중요 임무 종사’라는 죄목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박관현은 5 · 18 진상 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 개선을 주장하며 몇 차례에 걸쳐 40여일 간 옥중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장기간의 단식 과정에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박관현은 1982년 10월 12일 새벽,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으로 피를 토하며 전남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팔꽃이 막바지에 이른 계절에 나팔꽃씨를 몰래 갈아 넣은 배식을 장기간 먹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소문만 나팔꽃 넝쿨처럼 무성했다. 27년이 지나고, 그를 추모하는 행사에서 한 젊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꽃 나팔 소리 아침이다
영원한 날을 여는 초인超人의 음표는 방울, 방울 이슬에 깃들어 있다
꽃 나팔 소리 저녁이다
마지막 날을 닫는 미륵의 돌쩌귀 소리에 놀라 한 줄 햇살은 서둘러 빗장을 건다
시간의 지도리는 바람의 강물을 타고 저 혼자도 열렸다 저 혼자도 닫혔다 소리도 없고 춤도 없는 노래, 아직 이슬에서 깨어나지 못한 음표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데……
꽃이 핀다 색도 향도 없이 소리로, 소리로 피는 꽃은 노래가 된다 소리로 피는 꽃은 마음의 귀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 영원의 문에 닿아 부서진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데” 박관현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다.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법과대학으로 오르는 길목에 박관현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정문에서 용봉탑에 이르는 길을 ‘관현로’라고 부른다. 2012년 박관현 열사 30주기를 맞아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새벽 기관차 - 박관현 평전』이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