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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은 4대종교를 품어 안은 성지순례의 메카입니다.
영광 4대 종교 문화인 기독교, 백제불교, 원불교, 천주교 탐방과 템플스테이 등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져보세요
불갑사는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위치해 있으며 남녀노소 모두가 입장할 수 있으며, 청소년 여름방학, 겨울방학 각종 템플스테이(Temple stay)에 신청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초사흘 정기법회, 동안거 백일기도, 108배 등 연중 다양한 행사와 시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찾아가는 불갑사 산사체험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참 나를 찾아가는 여유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수 있으며, 자연과의 일체의식 형성과 축적된 경험과 성과들을 토대로 전통흙집의 장점들을 계승하고 다소 불편함을 초래했던 기존 구조 등에 대해서는 편리를 추구한 현대적인 구조공간과 적절히 접목시켜 현대화된 황토집 건축기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주변환경과 명상을 위한 탑원, 야외좌선대 등 최상의 수련 환경을 갖춘 사찰에서, 방학을 맞이한 귀여운 자녀들이 가정을 떠나 자신을 성찰하고, 단체생활을 통한 절제와 조화 그리고 이웃을 살피는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의 전법(傳法) 및 창건(創建)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나제지시(羅濟之始) 한위지간(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라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및 6.25 동란기
일제 강점기에는 나한전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칠성각이 신축 되었으며, 만암(曼庵)스님정축년(1937년)에 후원자리에 있던 명부전을 대웅전 앞 중정 좌편 현위치로 이건하고,개금개채(改金改採)를 한 후 기문(記文)을 남겼다.
1938년 설제(雪醍)스님에 의해 만세루, 일광당 등의 보수불사가 이루어졌다. 만암스님은 백양사의 제 5창주이며 선교율을 겸수하였고, 조계종 종정을 지내기도 하셨다.
1934년 가을 야간에 불갑사 산중에 있던 각 부도가 모두 도굴당하고 파손되어 설호스님이 남아있던 부도 6기를 모아 불갑사 앞 남록에다 옮겨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불갑사에는 일제말기까지도 선원과 강원이 개설되어 정진하는 승려들이 많았었으나, 6.25 동란 시 빨치산 토벌대에 의하여 산너머 용천사는 물론이고 산내의 암자인 해불암, 불영대, 전일암, 오진암, 수도암 등이 불태워져 버렸다. 이 와중에 해불암에 모셔져 있던 古삼존불상이 불갑사 포교당 원각사로 옮겨 모셔졌다.
그 후 해불암, 불영대, 전일암, 수도암은 작은 규모로 복원되었으나 오진암은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였고, 또한 전일암은 1985년 화재로 인하여 다시 소실되었다.
영광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894년 이눌서와 유대모 선교사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지방의 관문인 군산에 도착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 무렵 한반도 최초의 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신자가 되어 돌아온 우리나라 청년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기독교회사에서 밝혀졌다. 공식적으로 한국의 개신교 전래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이날은 한국에 장로교·감리교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남장로교의 선교사들이 입국한 다음 해인 1893년 1월 28일 한국에 주재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ment)'를 조직하였다.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와 황해도 및 경상북도로 선교구역을 담당하였고, 이 정책에 의해 전라도는 보수적인 남장로교 선교회의 선교지역이 되었다.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에서는 전라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답사를 실시하였는데 1894년 3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5월 12일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험난한 선교여행 중 이눌서와 유대모 선교사는 4월 16일(영광장날) 영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이들은 전도지를 나눠주고 전도 강연을 실시했다. 이들이 바로 영광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영광에는 1903년 대전리교회(현, 백수읍교회)와 1905년 무령리(武靈里)교회(현,영광대교회), 1908년 염산리(鹽山里)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신천리교회(1904년)의 설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894년 이눌서와 유대모 선교사, 이 두 명의 선교여행으로 몇해 후 공식적인 교회의 시작은 1903년 대전리교회, 1904년 신천리교회, 1905년 무령리교회, 1908년 염산교회 등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불법연구회는 약 1년 동안 서울역과 부산역 그리고 전주와 익산역에서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고 건국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념과 제도적으로 중도주의를 지향하는 건국방안인 ‘건국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념 대립의 심화와 분단국가 수립과정에서 그 입지를 잃고 말았다. 1943년 소태산의 열반 이후 송정산(법명 규奎, 1900~1967)이 교단 책임을 이어 받았고 해방이 되면서 교명을 ‘원불교’로 바꾸었다. 당시 원불교 교단은 분단체제의 성립과 6·25의 전란 속에서도 교단 내부적인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교화, 교육, 복지의 3대 목적사업 추진에 역량을 집중했다. 1970년 개교 반백년기념대회까지 한국 내에 170여개 교당을 설치하고 1천여 명의 교역자를 양성하여 한국사회의 새로운 종교로 주목받을 만큼 성장을 이룩하였다. 해방 후 원불교의 교화활동은 위의 3대 목적사업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원불교는 명칭에서부터 ‘불교’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어서 불교의 한 종파 또는 새로운 불교 종단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소태산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원불교는 처음부터 불교 종단과는 별개로 성립된 종교이며 독립된 교리체계와 교단 조직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교단 명칭이 불법연구회였던 사실에서 보여주듯이 불교에 의탁하고자 한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유·불·선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천도교 등의 동서양의 여러 종교의 경전을 열람한 바 있었다. 그는 각 종교 경전을 열람한 소회를 ‘자신이 깨달은 바는 이미 과거 성현들이 깨달은 바와 같다’고 하고, 모든 종교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각 시대와 지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를 폈을 뿐이라고 하여 모든 종교의 교의가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의 진리가 가장 광대하고 대중을 교화하는데 적절함으로 자신의 연원을 석가모니불로 정한다고 하고 장차 불법을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의 새 종교를 창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었다. 소태산의 이러한 태도는 원불교 교의의 ‘통종교적’ 지향을 나타낸 것이며 원불교와 불교의 관련도 소태산의 불교에 관한 인식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영광은 천주교광주대교구의 신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중국 북경에서 구베아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전라도의 경우 한국천주교회 창설 직후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진산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무장의 최여겸(崔汝謙: 마티아)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뒤 전라도 각지로 복음을 전파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영광에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래 되었으며 이화백, 오씨, 이우집, 최일안, 이종집, 남조이, 김득겸, 윤종백 등이 신앙생활을 하던 중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로 최여겸으로부터 교리와 세례를 받은 월산리의 이화백과 복산 거주 양반 오 씨는 영광에서 참수되고, 월산리에 살던 유관검의 사돈 이종집과 남조이(김득겸의 아내)는 황해도 문화와 은율로 각각 귀양을 가게 되고, 당대 조선천주교회의 최초의 여회장이었던 강완숙의 딸 홍순희는 영광으로 유배를 왔다. 그 후 병인박해 시기인 1867년에 영광 뜸밭 출신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치명되었고, 영광 신어실에 거주했던 유문보 바오로는 1872년 나주에서 심한 고문과 후유증으로 옥사, 치명했다.
이화백과 오 씨가 영광에서 참수된 순교터는 수차례 고증과 학술회의를 통해 현재 도동리 석장승 남쪽 우시장 자리, 지금의 영광성당 정문 앞으로 추정된다. 석장승 남쪽은 영광읍 성 남문 밖이고, 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대로변으로 일제 강점기 때에 우시장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었다. 1832년(순조 32년) 조선시대에 잡귀, 액, 살 등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도동리에 석장승을 세운 것과 죄인의 참수 후에 칼을 씻었던 개천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도동리 홍교와 군중이 모이는 우시장은 죄수들이나 천주교 신도들이 참수된 순교터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천주교광주대교구는 순교터와 접한 영광성당을 1801년 신유박해시기에 영광에서 순교한 이화백과 오 씨와 그 밖에 영광출신 및 거주했던 순교자 네 분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9월 10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하였으며, 2014년 6월 28일 영광순교자기념성당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17년 5월 13일 영광성당 설립 80주년(1937-2017년)을 맞아 영광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영광순교자 기념관 본관에는 영광의 순교자 여섯 분과 유배자 세 분, 그리고 당대의 신자 두 분을 스테인드글라스 대작에 담고 있다. 그리고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동료 순교자 123위 성화(주중직심도)가 조선시대의 생활용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영광순교자의 기도상과 이화백 오 씨 두 분의 모습이 청동 부조로 작품화되어 있으며, 영광순교자와 유배자들, 그분들과 연관된 세 분의 복자(유항검, 강완숙, 최여겸)들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여섯 분의 성인 유해가 순교자 기념관 안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입구에는 영광의 역사와 문화(4대종교)가 소개되어 있고, 초기 교회 서적들과 순교자들 관련 고서 및 박해시대로 추정되는 성물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영광본당 80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본당 역사실이 있다.
영광성당은 1937년 설립되어 초대주임인 강토마스 멀겐 신부는 현재의 부지 1,851평과 한옥 한 동을 매입하였고 1942년 80평 규모의 성당을 신축하였으나 1950년 6.25때 공산군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 뒤 폐쇄된 후 1965년 재 설립되었으며 1967년 5월 13일 교구장 현하롤드대주교에 의해 주보성인을 성 로베르또 벨라르미노로 정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설립 초기부터 1992년까지 성 골롬바노 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이 성당을 발전시켰으며 이후 한국 사제들이 현재까지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2014년 영광순교자기념성당이 2014년 새로 축성되면서 옛 성당은 순례자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